ORIGIN
유래.
4·3희생자 추념일은 제주4·3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 위로하는 국가기념일이다. 제주4·3특별법은 이 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광복 직후 제주는 귀환 인구의 실업, 생필품 부족, 콜레라, 흉년 등으로 몹시 어려웠다. 1947년 3·1절 기념대회 때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자 총파업과 대규모 검거가 이어졌고,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대가 경찰지서 등을 습격하면서 무력 충돌이 본격화됐다. 이후 군경 토벌대의 강경 진압, 특히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 마을을 불태운 이른바 초토화작전으로 많은 주민이 희생됐고,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진 주민도 있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출입 금지가 풀리며 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끝났다. 정부는 2014년 3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4월 3일을 추념일로 지정했다.
A LITTLE MORE TO KNOW
이야깃거리.
정부가 2003년 확정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당시 인명 피해를 2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한다. 이와 별개로 4·3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공식 결정한 희생자는 2026년 4월 기준 1만 5,218명이다. 앞의 수치는 추정치이고 뒤의 수치는 신고와 심사를 거친 결정 인원이어서, 두 숫자를 같은 의미로 쓰면 안 된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보고서를 바탕으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제주4·3평화기념관 상설전시실 첫머리에는 글자 없이 누워 있는 비석 '백비(白碑)'가 있다. 4·3이 아직 올바른 이름을 얻지 못한 역사라는 뜻으로, 진정한 해결이 이뤄지는 날 비문을 새기고 비석을 세우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진상조사보고서 역시 사건 전체의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내리지 않고 후대의 몫으로 남겼다. 오랫동안 금기였던 위령 행사는 1989년 시민사회단체가 연 추모제를 거쳐 국가 추념일로 이어졌고, 추념 행사는 행정안전부가 주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