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
유래.
3·15의거 기념일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당일, 노골적인 부정선거에 항의해 경남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기리는 국가기념일이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투표 시작 전에 여당 표 40%를 투표함에 미리 넣어 두는 '4할 사전투표', 3명이나 9명씩 조를 짜 조장이 기표 내용을 확인하는 '3인조·9인조 공개투표' 같은 수법을 썼다. 마산에서는 오전부터 민주당이 선거 포기와 무효를 선언했고, 오후에는 시민들이 거리로 모여 평화적인 행진을 벌였다. 저녁 개표가 시작되자 시위대는 1만 명 가까이 불어났고, 저녁 8시 이후 경찰이 실탄을 쏘기 시작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경찰이 평화적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이날 7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고, 소년 김주열은 행방불명됐다. 마산시는 1993년 이날을 시 기념일로, 경상남도는 2003년 도 기념일로 정했으며, 정부는 2010년 3월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A LITTLE MORE TO KNOW
이야깃거리.
3·15의거는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행방불명됐던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자, 분노한 마산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를 4·11 제2차 마산의거라고 부르며, 이 시위는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당시 정권은 시위를 공산당과 엮으려 했지만, 1960년 6월 검찰 수사에서 경찰이 총에 맞은 시위대의 시신에 불온 전단을 넣어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구 2·28과 대전 3·8이 학생들의 항의로 시작됐다면, 3·15는 선거 당일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고 경찰의 집단 발포로 첫 희생자가 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3·15의거는 4·19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평가된다. 1960년 봄의 항쟁 가운데 국가기념일 지정은 4·19 다음으로 빨랐고, 2011년부터 국가보훈처(지금의 국가보훈부) 주관으로 기념식이 열린다. 창원시 마산회원구에는 국립3·15민주묘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