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
유래.
6·25전쟁일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쪽으로 쳐들어오며 시작된 6·25전쟁을 되새기는 정부 기념일이다. 광복 직후 한반도에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에 미군, 북쪽에 소련군이 들어왔고, 통일 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이 실패하면서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됐다. 전쟁이 터지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그날 북한의 무력 공격을 침략 행위로 규정했고, 6월 27일에는 회원국들에 한국을 도우라고 권고했다. 북한군은 개전 사흘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버티다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했지만,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세는 다시 뒤집혔다. 1951년 7월부터는 휴전회담과 전투가 함께 이어졌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총성이 멎었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일시적으로 멈추기로 한 합의이지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낸 평화조약이 아니다.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은 이날 6·25전쟁을 상기해 국민의 안보의식을 북돋우는 행사를 하도록 정하고 있으며, 국가보훈부가 주관한다.
A LITTLE MORE TO KNOW
이야깃거리.
이 기념일의 예전 이름은 '6.25 사변일'이었다. 과거 기념일 규정에는 이 이름으로 올라 있었고, 지금 규정에는 '6ㆍ25전쟁일'로 적혀 있다. 정전협정에는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와 북한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가 서명했고, 대한민국 대표는 휴전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전쟁이 남긴 큰 상처 가운데 하나는 헤어진 가족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산가족의 수를 정확히 밝히기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1000만 명 규모로 말한다고 설명한다. 통일부 집계에 따르면 북의 가족을 찾겠다며 정부에 신청한 13만 4,516명 가운데 2025년 말까지 10만 명 넘게 세상을 떠났고, 남북 당국 차원의 상봉은 2018년 8월이 마지막이었다. 이 전쟁에는 전투 병력을 보낸 16개국과 의료 지원을 한 6개국 등 22개국이 유엔군으로 참전했다. 6월 25일은 이런 사실을 함께 돌아보며 전쟁과 분단이 지금도 이어지는 문제임을 생각해 보는 날이다.